미국 생활 7년 차에 접어들며 느끼는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바로 미국의 독특한 지역색이다. 어느 동네든 파고들면 저마다의 역사가 나오는데, 이게 내가 학교에서 들었던 세계사나 미국사의 큰 줄기와 딱 맞물릴 때의 쾌감이 쏠쏠하다. 그러다 보면 발음조차 어려운 우리 동네의 생소한 지명들이 왜 그렇게 지어졌는지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앞으로 뼈를 묻고 살아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은 어색하겠지만, ‘필라델피아 교외 주민’이라는 타이틀은 이미 내 옷처럼 편안하다. 용인이나 분당에 살 때도 못 느껴본 애향심이 여기서 생기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아마 도시의 소음 대신 들리는 이 동네만의 호젓한 평화로움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이 애향심을 동력 삼아, 공부도 할 겸 우리 주와 카운티의 트리비아를 내 맘대로 가볍게 정리해 보려 한다.

지명 (난이도: 극상)

우리 동네에는 처음 본 순간 뇌 정지를 일으키는 지명들이 꽤 있다. ‘도대체 이걸 읽으라고 만든 건가?’ 싶은 난해한 이름들 말이다. 동네 모임에서 가볍게 일상 대화를 나누려다가도 지역 이름이 나오는 대목에선 나도 모르게 움츠러든다. 우리 동네인데 왜 말을 못 하니! 내 입인데도 지명만 만나면 렉이 걸리는 이 기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거다. (나만의 문제는 아닌듯… 여기 유튜브 플레이 리스트도 있다)

Conshohocken (컨쇼호켄), Tulpehocken (툴페호켄), Wissahickon (위사히콘)

이 땅의 원주민이었던 레나페(Lenape) 부족의 언어가 그대로 남은 경우다. 길게 늘어지는 발음과 반복되는 음절 덕분에 거의 간장공장 공장장 수준의 혀 꼬임을 선사한다.

Tredyffrin (트레디프린), Uwchlan (유클란), Bala Cynwyd (발라 킨위드), Gwynedd (귀네스)

퀘이커 교도들이 정착한 곳답게 웨일스어 지명도 곳곳에 남아 있다. 필라델피아 근교에 거주한 지 벌써 7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런 이름들은 읽을 때마다 긴장하게 만든다.

Schuylkill (스쿨킬)

영국이 깃발을 꽂기 전, 이 동네를 부지런히 누볐던 네덜란드인들의 흔적이다. 대부분 영국식 이름으로 갈아치워졌지만, 이 이름만큼은 네덜란드어의 자존심을 지키며 꿋꿋하게 살아남았다. (참고로 ‘킬(Kill)‘은 네덜란드어로 강이나 물길을 뜻한다. 죽인다는 뜻이 아니다!)

먼 역사 (a.k.a. 펜실베이니아의 탄생)

지명이 이토록 다양한 이유는 이곳이 레나페 부족의 터전에 스웨덴, 네덜란드인들이 간간히 숟가락을 얹다가, 1681년 역사의 대전환점을 맞아 유럽 정착민들이 몰려온 곳이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 국왕 찰스 2세는 고(故) 윌리엄 펜 제독에게 진 막대한 빚을 갚아야 했다. 나라 곳간이 비었던 왕은 현금 대신 땅으로 때우기로 결심하고, 제독의 아들 윌리엄 펜에게 광활한 영토를 하사한다. (도대체 얼마를 빌렸길래…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당시 금액으로 약 16,000파운드, 현재 가치로는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이었다고 한다.)

퀘이커 지도자였던 펜은 이 땅을 종교적 관용과 양심이 살아있는 신성한 실험(Holy Experiment) 의 장으로 만들기로 하고, 필라델피아(Philadelphia), 벅스(Bucks), 체스터(Chester)라는 세 개의 초기 행정 구역을 세운다.

잠깐 상식: ‘퀘이커(Quaker)‘는 사실 “하나님 앞에서 벌벌 떤다”며 비웃던 조롱에서 유래했다. 당시 영국 국교회(성공회)의 탄압을 피해 목숨 걸고 건너온 사람들의 눈물 젖은 역사가 담긴 이름인 셈이다.

당시 체스터 카운티의 경계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광활했다. 델라웨어강에서 시작해 서쪽 서스쿼해나강 너머까지 뻗어 있었으니, 오늘날의 델라웨어, 요크, 랭커스터 카운티를 다 합친 압도적인 영토였다. 당시엔 인구 밀도가 너무 낮았기 때문에 사람이 별로 없으니 굳이 촘촘하게 나눌 필요가 없었다가, 이주민들이 서쪽으로 점점 밀고 들어가면서 “우리 동네에도 관공서가 필요하다!”는 요구가 빗발쳤고, 그때마다 카운티가 쪼개지며 지금의 지도가 완성되었다. 결국 이 난해한 이름들과 복잡한 정착사는, 서로 다른 꿈을 품고 이 땅에 모여든 사람들의 치열한 흔적이었던 셈이다.

지도로 보는 체스터 카운티의 변화

1719: 펜실베이니아 서쪽 끝까지 다 우리 동네였던 시절. 1729: 서부 정착민이 많아지자 결국 랭커스터 카운티가 독립했다. 1759: 랭커스터, 요크, 델라웨어가 다 독립해 나간 후

정착민들의 동상이몽

윌리엄 펜은 이 넓은 땅을 채우기 위해 웨일스에서 공격적인 이주 마케팅을 펼쳤다. “종교 자유 보장! 땅값 저렴!”이라는 파격 조건에 낚인(?) 웨일스 퀘이커교도들은 오늘날의 델라웨어와 체스터 동부 일대에 약 4,900만 평 규모의 웨일스 트랙(Welsh Tract)을 일구었다.

이후 독일계와 스코틀랜드-아일랜드계가 밀려 들어오며 동네 분위기는 묘해졌다.

  • 퀘이커: “싸우지 말아요, 평화가 최고입니다.”
  • 스코틀랜드-아일랜드계: “무슨 소리! 저 앞의 위협부터 처리해야 우리가 삽니다!”

평화주의자 퀘이커와 거친 변방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개척민들은 원주민 정책을 두고 사사건건 부딪혔다. 펜의 이상주의와 개척민의 생존주의가 정면충돌한 셈이다.

참고로, 랭커스터 근처의 펜실베이니아 더치(Pennsylvania Dutch)는 사실 네덜란드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한다. 독일어권에서 온 ‘도이치(Deutsch)’ 발음을 당시 미국인들이 ‘더치’로 잘못 듣고 굳어진 것이다. 그러니 이 동네에서 ‘더치 식당’에 가서 네덜란드식 튤립이나 운하를 찾지는 말자.


Reference: Chester County, Pennsylvania — Encyclopedia of Greater Philadelphia*